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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문예/영성 | Art / Spirit -


[문학] 김규나 작가의 북한 인권을 다룬 단편소설 - "우리, 지금은 멀리 있어도"



업소록 : 광고문의

한강 작가의 역사편식에 경종을 울린

김규나 작가의 북한인권을 다룬 단편소설

"우리, 지금은 멀리 있어도"


https://blog.naver.com/foxinthemoon/2236248378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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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출처: 나무위키 


[김규나 단편 소설]

우리, 지금은 멀리 있어도

김규나


1.

기차는 달린다. 철컹철컹. 족쇄와 수갑이 부딪치는 것 같은 소리를 내며 기차는, 검은 레일 위를 달린다. 금방이라도 꺼질 것처럼 깜빡거리며 수화물 칸을 비추는 형광등 불빛은 창백하다. 차가운 영안실에 부려진 시체처럼, 서른세 개의 침묵하는 그림자들만 희미하게 흔들린다.


수없이 발길질을 당해도 모멸감은 사라지지 않는다. 얼굴과 등과 배를 무차별 가격하던 구타 뒤에도 고통은 무감해지지 않는다. 몇 리터의 피를 더 흘리고 몇 개의 뼈가 더 부러져야 죽을 수 있을까. 물음표만 남은 눈동자에는 진작 죽었더라면, 하는 자괴감이 서려있다. 살려달라고 애걸하는 비굴도, 지금까지 견딘 것보다 더한 고문을 당할 거라는 두려움도, 결국 총살당하고 말 거라는 체념조차 놓아버린 표정들.


발이 시리다. 두 발을 포개 체온을 높여보려고 다리를 움직인다. 나도 모르게 입술 사이로 신음이 새어 나온다. 어금니를 깨무는 턱이 부르르 떨린다. 고통이 사라지지 않았으므로 아직, 나는 살아 있다. 등 뒤로 수갑이 채워진 채 바닥에 내던져진 그대로 쓰러져 있던 나는, 벽을 지팡이 삼아 몸을 일으켜 앉는다. 하나밖에 없는 수화물 칸의 창은 키 높이보다도 한참 위에 있다. 저 창밖, 세상 어딘가에는 불빛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눈에 보이는 건, 오직 칠흑 같은 어둠과 흐릿하게 반사된 화물칸 내부의 정적이다.


이번엔 태국을 통해 한국으로 가는 루트를 택했다. 베이징 공항에서 조선족 위조여권이 적발되었다. 베이징 공안으로 끌려갔다. 국적을 대라고 했지만 말하지 않았다. 손이 뒤로 묶인 채 취조실 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은 내게 조선족 공안이 거지새끼,라고 욕했다. 번갈아 양쪽 따귀를 때렸다.


"바퀴벌레만도 못한 배신자, 조국의 반역자"


그가 침을 뱉었다. 발길질을 했고 머리끄덩이를 낚아채 벽에 이마를 박았다. 발에 챈 빈 깡통처럼 바닥을 뒹굴었다. 코피가 흘렀고 입술이 터졌고 이마가 깨졌다. 시멘트 벽 위에 검붉게 말라버린 수많은 핏자국 위에 내 피가 섞였다. 전기 곤봉이 허벅지에 닿자마자 눈앞이 하얗게 바랬다. 무릎을 꺾고 바닥에 푹 고꾸라졌다.


"견아."


그리운 목소리가 들렸다. 어머니였다. 아버지였는지도 몰랐다. 감겨있던 눈꺼풀을 천천히 들어 올렸다. 불현듯 눈앞이 환해졌다. 그 빛은 여름 한낮, 평양 시내의 아침 햇살처럼 따듯했다. 넓은 도로에 검은색 외제 승용차와 전차가 지나갔다. 달콤한 공기 냄새가 코끝을 간질였다. 하얀 목란과 붉은 진달래가 등굣길을 따라 피어 있었다. 하얀 셔츠에 감색 조끼를 입은 아이들이 참새 떼처럼 구호를 외치며 줄지어 교문으로 들어갔다. 붉은 스카프로 멋을 낸 소녀들이 까르르 웃었다. 푸른 상의를 입은 대학생들이 가방을 손에 쥐고 경쾌하게 걸어가던 길이었다.


수십 동의 스탈린 식 건물이 서 있는 교정, 바이올린과 피아노, 개량한 국악기들의 연주 소리가 흘러넘쳤다. 어느 연습실에선가 들려오는 차이콥스키의 피아노 협주곡은 처음 건반을 만지던 날의 기억을 불러왔다. 작은 손가락으로 건반을 살짝 눌러보던 순간의 부드럽고 정결한 감촉. 그날 이후 내가 열망한 것은 단 하나, 영혼을 전율시키는 한 소절의 선율. 마음을 사로잡을 한 장의 악보, 지옥에서조차 꿈꾸었던 여든여덟 개의 건반이었다. 그리고 미송. 첫 입맞춤을 하던 날, 그녀의 입에서 느껴지던 사과향기는 왜 오랜 시간이 흘러도 지워지지 않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세상은 손가락질했으나 그곳에도 내가 꿈꾸던 미래가 있었다. 나는 그곳을 향해 손을 뻗었다. 하지만 이내 불이 꺼졌다.


나는 거꾸로 매달려 있었다. 두세 명의 공안이 순서를 돌려가며 자신들이 지칠 때까지 나를 두들겨 팼다. 이마와 머리로 뜨끈한 피가 흘렀다. 눈을 뜰 수 없었다. 각목이 몇 개나 부러졌다. 숨이 차는지 거칠게 씩씩거리던 공안 하나가 고무 곤봉을 집어 들었다. 겉으로는 멍이 들지 않지만 안에서 혈관이 터질 거라고, 겁을 주었다. 거짓이 아니었다. 고통이 뼈를 파고들었다. 종소리의 파동처럼 통점은 둥근 원을 그리며 몸 전체로 깊고 넓게 퍼져나갔다.


취조실에 끌려온 뒤 한 번도 비명을 지르지 않았다. 머리를 감싸 쥐지 않았다. 겨드랑이 밑에 양손을 끼워 넣은 채 이를 악물고 버텼다. 그것이 사내를 약 오르게 한 것 같았다. 그는 헐떡거리면서도 매질을 멈추지 않았다. 여든여섯, 여든일곱, 속으로 매질의 숫자를 세었다. 매번 끝까지 세지 못했다. 조명과 어둠이 교차되고 소음과 적막이 엇갈리기를 반복했다. 결코 끝에 다다르지 않을 것처럼 까마득한 시간이었다.


"북조선..."


기어이 신음처럼 실토했다. 꼬박 열일곱 시간 동안 매를 맞은 뒤였다. 지독한 놈. 공안이 이를 갈았다. 천장에 매달린 밧줄을 풀어주었다. 풀썩, 나는 넝마처럼 바닥에 곤두박질치며 널브러졌다. 내 손가락을 끌어다 한국행을 시도했다는 자백서에 지장을 찍게 했다. 불법 월경자로 낙인찍어 강제북송하기 위한 절차였다. 벌써 세 번째 실패였다. 돌아가면 공개처형될 게 자명했다. 차라리 여기서 죽었으면 하고 바랐다. 매 맞다 죽으면 나 혼자 죽지만, 살아서 돌아가면 형도, 어머니도 죽게 될 것이다.


"왜 팔짱을 풀지 않았나?"


곤봉을 집어던지고 나가려던 공안이 내려다보며 물었다. 머리를 감싸 쥐며 살려달라고 빌어야 하지 않았느냐고, 공안이 눈을 부라렸다. 시린 바닥에 뺨을 대고 쓰러져 있던 나는 그의 얼굴을 찬찬히 올려다보았다.


마흔은 넘어 보였다. 거리에서 만났다면 평범해 보일 사내였다. 아버지의 벤츠를 운전하던 기사를 닮은 것도 같았다. 이 사내도 누군가의 아들이고 누군가의 남편이고, 몇몇 아이들의 아버지겠구나, 나를 때리는 것으로 하루 밥벌이를 했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름이 뭡니까?"


내가 쉰 목소리로 물었다. 입안에서 미지근하고 비린 피 맛이 느껴졌다. 그는 이맛살을 잔뜩 찌푸리고는 대답하지 않았다.


"나를 고문한 공안이 아니라 그냥, 사람에게 말하고 싶어서 물은 겁니다."


내가 쓸쓸하게 말했다.


"나는 피아니스트입니다. 머리는 깨져도 괜찮지만 손가락이 없으면 피아노를 못 치지 않겠습니까."


내가 체념한 듯 웃었다. 공안의 눈은 힘없이 바닥에 닿은 내 손가락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는 결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입을 실룩거렸다. 미친 새끼, 비웃고는 다시 한번 발로 나를 걷어찼다. 부서져라 문을 닫고 나갔다. 통증이 번지는 복부를 끌어안고 새우처럼 허리를 접었다. 클클,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났다. 소리 내어 웃는데도 귓가로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열차는 달린다. 열차는 탈선하지 않는다. 충돌하지 않는다. 무사히, 목적지에 도착해 북조선 군사에게 우리를 인계할 것이다. 온기라고는 느껴지지 않는 11월의 냉기와 바람이 화물칸으로 스며든다. 헝클어진 머리카락. 피와 때가 엉겨 붙은 피부, 부르튼 손과 발톱이 빠져버린 맨발. 서른세 명의 여자와 남자는 추위를 느끼고 몸을 떤다. 항문도 성기도 자궁도 수치심으로부터 지켜내지 못했으면서도 어깨춤으로 목을 밀어 넣는다.


송환 기차를 기다리는 며칠 동안, 하루치 묽은 감자 죽과 썩은 옥수수 몇 알이 지켜낸 목숨이다. 죽어버린 노파의 입에서 강냉이를 서로 꺼내 먹겠다고 아귀다툼을 하며 움켜쥔 목숨이다. 어쩌면 살아날 수 있을지 몰라, 여기가 끝이 아닐지 몰라, 위태롭게 흔들리던 희망의 불씨 때문이었다. 기차역에 끌려 나온 서른다섯 명 중 두 명이 달아났다가 20분 만에 붙잡혀왔다. 겨우 숨이 붙어 있는 것 같았다. 기차에 태운 것 같았지만 화물칸에는 보이지 않는다.


철컹. 철컹, 기차가 커브를 돈다. 기차가 한쪽으로 기운다. 살아야겠다는 욕망과 의지가 죽어버린 허깨비, 꼼짝도 하지 않던 그들의 그림자가 조용히 흐트러진다. 한쪽으로 쏠린 몸을 일으키느라 육체만 남은 유령들이 허우적거린다. 살려주세요. 그들 가운데 희미하게 목소리가 새어 나온다. 형광등 불빛도 닿지 않는 구석진 자리. 혼자 웅크리고 있던 여자가 흐느낀다.


깡마른 몸에 비해 배가 불룩하다. 앙상한 손으로 만삭의 배를 감싸고 있는 여자가 떨리는 목소리로 살려주세요, 다시 한번 가냘프게 애원한다. 스무 살이나 되었을까. 여자의 엉덩이 밑으로, 고여 있던 검붉은 액체가 주르륵, 기차가 기운 방향으로 미끄러져 흐른다. 유령들은 놀라지 않는다. 유령들은 비명을 지르지 않는다. 어차피 죽을, 여자와 뱃속의 태아가 흘리는 피를 물끄러미 바라볼 뿐이다.


미친 새끼.라고 말했던 그 공안이다. 물고 있던 담배꽁초를 바닥에 던지고 군화 발로 짓뭉갠다. 여자에게 다가가 발로 툭 건드린다. 아기만이라도, 살려주세요. 여자가 공안의 팔에 매달린다. 어린 것이 함부로 몸 굴리고 어디 와서 엄살인가. 송충이를 털어내듯 야멸치게 밀쳐낸다. 재수 없구만. 말을 씹어뱉으며 흘낏 여자를 쳐다본다. 저러다 죽는 게 아닐까, 내심 골치가 아픈 것 같다. 서류 작성이 끝난 탈북자가 북송 중 죽으면 외교적 문제가 될지도 모른다.


"죽을 때 죽더라도!"


내가 소리친다. 공안이 나를 노려본다. 고개를 갸웃 기울인다. 책임을 면할 핑계, 할 만큼 했다는 구실이 필요하다는 걸 깨달은 눈치다.


나는 달린다. 처음 본 여자를 안고 맨발로 달린다. 만삭인데도 가벼운 여자를 안고 달리는 나는 휘청거린다. 객실 다섯 칸을 지나 의무실까지 달리는 통로는 너무 좁고, 너무 멀다. 여자는 계속 피를 흘린다. 여자와 내가 뿜어내는 악취를 참으며 승객들이 슬며시 고개를 돌린다. 더러운 것이 옷에 묻을까, 몸을 사린다. 나는 무릎이 꺾여 넘어지지 않으려고 이를 악문다. 나는 달린다. 여자의 눈빛은 자꾸만 흐릿해진다.


2.

나는 달렸다. 오전 여덟 시, 푸시킨 스카야 역에서 내려 차이콥스키 음악원으로 향하는 길, 나는 언제나 달렸다. 조금이라도 빨리, 피아노 앞에 앉고 싶었다. 절대 둘이 떨어지면 안 된다고 지시를 받았지만 제 키만 한 첼로를 어깨에 멘 두식도 이 시간만큼은 눈감아주었다. 음악원이 가까워질수록 심장박동은 빨라졌다.

벌써 연습을 시작한 학생들이 만들어내는 소리는 멀리까지 들렸다. 바이올린과 피아노, 바순과 클라리넷, 소프라노와 바리톤이 내는 소리가 바람을 따라 거리를 흘러 다녔다. 베토벤과 라흐마니노프, 쇼팽과 리스트도 함께 어우러졌다. 이른 산책을 나온 노인들이 계단에 앉아 지그시 눈을 감고 음악에 귀 기울였다. 개별 연습실에서 한 명 한 명의 몰입과 집중이 빚어낸 각각의 소리들은 오케스트라의 연주가 닿을 수 없는 독특한 감동이 있었다.


나는 세계 각지에서 모인 젊은 음악천재들이 만들어내는 이 소음을 사랑했다. 숲에서 저마다 노래하는 다양한 새들의 지저귐처럼, 아무리 들어도 질리지 않았다. 학원 안으로 뛰어 들어가려던 나는 걸음을 멈추었다. 차이콥스키 동상을 바라보았다. 청동 옷을 입은 거장은 세상의 음악을 모두 끌어안을 것처럼 두 팔을 벌리고 먼 곳을 응시하고 있었다. 차이콥스키가 바라보는 방향을 나도 쳐다보았다.


끝도 없이 하늘이 펼쳐졌다. 눈부신 나뭇잎들 사이로 태양이 높이 솟아올랐다. 머리 위로 손바닥을 들어 올려 햇빛에 비추어보았다. 열 개의 손가락 사이로 햇볕이 투명하게 쏟아졌다. 차이콥스키 콩쿠르에서 입선을 하고 국비유학생으로 선발되어 모스크바로 올 수 있었던 건, 생애 가장 큰 행운이었다. 비록 대사관에서 숙식을 하며 온종일 감시를 받아야 했지만, 난생처음 평양을 벗어나서 보고 듣고 냄새 맡는 모든 것들을, 걷고 달리고 만질 수 있는 모든 시간을 나는 한 조각도 놓치고 싶지 않았다. 나는 주먹을 꼭 쥐었다. 햇빛을 한 움큼 손에 쥐고 음악원 건물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사범대학 교수였던 어머니는 어떻게 하면 당신의 두 아들이 정치 풍랑에 휩쓸리지 않게 할 수 있을까 고민한 것 같았다. 친가와 외가 모두 토대가 좋았고 아버지도 중앙당 간부로 일했다. 형과 내가 자라서 당원이 되고 정치의 핵심에 들어가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언제 칼바람이 불지 장담할 수 없는 일이었다. 두 살 위 형은 타고난 군인이라 포기했지만 어머니는 내게 음악적 재능을 발견하고 안도했다.


어머니 손에 이끌려 매일 열 시간씩 피아노 앞에 앉아 있기에 나는 너무 어렸다. 하루는 피아노를 치지 않겠다고 고집을 부리며 악보를 집어던졌다.


"당과 장군님을 위해 충성해야 할 사람이 이렇게 떼를 쓰면 어떡하니?"


피아노 선생이 따귀를 때렸다. 나는 울지 않았다. 잘 됐다고 생각했다. 문을 쾅 닫고 나갔다. 신이 나서 집으로 뛰어가 어머니께 일렀다. 그깟 피아노 당장 그만두라고 할 줄 알았다.


이걸 다 보고도 마음이 바뀌지 않는다면 그만두어도 좋다, 어머니는 비디오 영상을 틀어주고 방을 나갔다. 어떻게 구했는지, 그해 차이콥스키 국제 음악콩쿠르를 석권하고 세계적 피아니스트로 부상한 베레조프스키의 연주 실황이었다. 어머니는 웅장하고 깊은 음악의 힘이 어린 아들의 감성을 압도하리라는 것을 알았을 것이다. 테이프가 다 돌아갈 때까지 나는 한 번도 눈을 떼지 않았다. 고작 여섯 살이었으나 피아노를 저렇게 칠 수 있다면 무엇이라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대신 피아노 선생을 바꿔달라고 했다. 그 선생이 최고다. 그러나 어머니는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내 편이라고 믿었던 어머니에 대한 배신감이었을지도 몰랐다. 엄마한테 사랑받고 선생님한테 인정받으려면 이 길밖에 없구나, 영악하게 생존방식을 깨달았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다음날부터 새벽 일찍 일어나 건반을 두드렸다. 피아노 신동이란 찬사를 들으며 평양음악대학 초등부에 입학했다.


"당과 조국을 위해서 연주하는 그날까지 열심히 하겠습니다."


입학식을 마치고 온 날, 나는 어머니 앞에서 자랑스러운 듯 큰소리로 다짐했다. 어머니는 무릎을 꿇고 나와 키를 맞추어 앉았다. 엄마가 지금부터 하는 말은 비밀이야.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겠다고 약속해 주겠니. 어머니가 내 두 눈을 깊이 들여다보았다. 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머니가 나를 꼭 끌어안았다.


"피아노는 네 영혼을 위해 치는 거야. 아무도 네게서 음악을 빼앗아 갈 수 없단다."


어머니가 내 귀에 속삭였다.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오랫동안 나는 깨닫지 못했다.


평양음대를 졸업할 때까지, 나는 세상의 모든 걸 다 갖고 있었다. 원하는 건 무엇이든 할 수 있었다. 아버지는 평양에서도 몇 대 되지 않는, 운전기사가 딸린 벤츠로 출퇴근을 했다. 멋모르고 내게 손찌검을 했던 중학교 선생은 다음날 외지로 전출 당했다. 세계적 명품으로 손꼽히는 시계나 벨트는 남아돌았다. 최고의 시설이 갖추어진 수영장과 테니스장과 아이스링크도 원하면 마음껏 출입할 수 있었다. 맛도 모른 채 미제 담배 말보로를 피웠고, 생일을 맞은 동무의 축하파티가 열리는 날에는 한 병에 천 달러가 넘는 프랑스제 코냑을 밤새 마시고 토하고 또 마셨다. 나는 행복했다. 그것이 행복인 줄 알았다. 내가 무엇을 갖지 못했는지, 무엇을 가질 수 없는지, 무엇을 할 수 없는지, 나는 결코 알지 못했다.


세상이 내가 살고 있는 것과 다르다는 것을 처음 알게 된 건, 방학을 맞아 모스크바에서 평양으로 돌아오던 기차 안에서였다. 유학을 떠날 때 순안 국제공항에서 비행기를 타고 아홉 시간 만에 러시아에 도착한 것과 달리, 이후 평양을 오가는 길은 언제나 기차를 타야 했다. 모스크바에서 러시아 국경까지 1주일, 국경에서 다시 평양까지 1주일이 걸렸다. 4년간의 유학 생활 중 단 두 번밖에 귀향하지 못했지만, 오는 데 2주, 가는 데 2주, 러시아와 북조선을 잇는 철로 위에서 꼬박 한 달을 보내고 돌아오면 어이없이 방학이 끝나버렸다. 비행기를 타지 못한 건 나라에서 지원해 주는 돈이 없기 때문이었다. 고난의 행군 시기를 겪는 동안 수백만의 아사자가 있었다는 소문을 듣지 못한 건 아니었다. 설마 그토록 가난할까, 불순세력이 조작한 모함이라고 생각했을 뿐, 나는 귀담아듣지 않았다.


차창 밖에 펼쳐지는 풍경은 평양과는 너무 달랐다. 역이 아닌데도 기차는 고장과 연료 부족으로 몇 시간씩 멈춰 섰다. 기차가 통과하는 지방 어디에서도 목란 꽃은 피지 않았다. 울창한 플라타너스도 보이지 않았고 가지를 옮겨 다니며 지저귀는 새도 없었다. 백화점도 호텔도 없고 햄버거나 스테이크를 먹을 수 있는 레스토랑도 찾을 수 없었다. 아이들은 재잘대지 않았고 여학생들은 웃지 않았다. 광대뼈가 불거지고 볼이 깊게 팬 주민들의 얼굴은 죽음처럼 까맸다.


자본주의 국가들이 잘 사는 이유는 인민을 착취하기 때문이라고, 유학이 결정된 뒤 언어와 해외 생활에 대한 사전교육을 받는 6개월 동안 귀가 따갑도록 들었다. 러시아가 한창 개방의 거센 물결에 휩쓸리고 있었지만, 사회주의 국가인데다 평양과 모스크바는 닮은 데가 많았다. 크기만 보자면 모스크바의 붉은 광장보다 평양의 김일성 광장이 더 웅대했다. 차이콥스키 음악원보다 평양음대가 훨씬 웅장했다. 해외에 나가면 애국자가 된다는 말도 나의 자존심을 세우는 데 제 몫을 했다. 미국이나 유럽, 남한에서 온 학생들과 비교할 때 내가 스스로 느끼는 궁핍과 촌스러움조차 나는 수치스럽지 않았다. 인민을 위해 당과 조국이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자부했다. 무엇보다 유학을 마치고 돌아가면 보장받게 될, 국립 악단의 수석 피아니스트라는 탄탄한 미래도 자긍심의 이유가 되어주었다.


방학을 맞아 평양으로 돌아가는 기차 안에서 본 조국의 속살은 가난하고 헐벗은 불모의 땅이었다. 내가 무언가 잘못 알고 있는 게 아닐까, 나는 혼란스러웠다. 평양에 도착하고도 집으로 가지 못하고 호텔방에 3박 4일을 갇혀 있을 때, 내가 한 일, 내가 한 말을 조사받을 때,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것들조차 비판당하고 반성해야 할 때, 나는 당혹스러웠다. 어려서부터 일주일에 한 번, 유학 중 숙식하던 대사관에서도 이틀에 한 번, 몸에 밴 생활총화였지만, 혹시라도 두식이와 말이 맞지 않는 게 있을까 봐, 그 결과 사상을 의심받고 변절을 오해받아 모스크바로 돌아갈 수 없을까 봐, 양심이 꺼리는 일이 없는데도 간이 바짝바짝 마르는 긴장과 두려움을 경험했다. 세상을 다 가진 것만 같던 자만이, 반드시 알아야 할 무언가를 모르고 있기 때문에 일어난 착시가 아닐까, 자라목 같은 의심이 처음으로 고개를 쳐들고 있었다.


3.

강은 흐르지 않았다. 단단한 얼음이 표면을 뒤덮고 있었다. 하늘에 그려진 비행운처럼 쇄빙선이 지나간 자리마다 얼음이 깨졌지만 부서진 조각들은 이내 한 덩어리로 다시 얼어붙었다. 영하 20도가 넘는 추위가 연일 이어지고 있었다. 기상 캐스터는 사상 최악의 폭설이 곧 시작될 거라고 보도했다. 방향도 없이 달리던 내가 멈춰 선 곳은 모스크바 강 앞이었다. 숨이 차고 가슴이 터질 것 같았다.


마스터 클래스가 있는 날이었다. 20년 전 내 인생을 피아노 앞에 잡아둔 젊은 피아니스트, 어느덧 중년이 된 베레조프스키가 눈앞에 있었다. 학생들의 연주를 잠깐씩 듣고 짧지만 예리하게 조언할 때, 한 마디도 놓치지 않으려는 학생들의 열의로 강당의 공기는 델 것처럼 뜨거웠다.


"너의 테크닉과 청음은 최고다."


그의 즉흥연주를 따라 피아노를 친 나를 보며 말했다. 그건 분명 칭찬 같았다. 나의 심장이 두근거렸다.


"하지만 견,"


피아니스트가 잠시 후 내 이름을 불렀다.


"너의 음악은 어디에 있는가?"


그의 눈이 나를 깊이 들여다보았다. 자신의 손을 왼쪽 가슴 위에 가만히 얹었다. 아무 말 없이, 심장의 온기를 느껴보려는 듯, 그는 가만히 눈을 감았다. 강당에는 누구도 깰 수 없을 것 같은 정적이 흘렀다. 잠시 후 그는 다시 강의를 이어갔지만 내 귀엔 아무 말도 들리지 않았다.


해가 기울고 있었다. 두식을 만나 대사관으로 돌아가야 할 시간이었다. 하지만 나는 눈앞에 보이는 카페에 들어가 어머니가 보내준 비상금으로 술을 마셨다. 뉴에이지 풍의 피아노곡이 스피커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미국이나 유럽, 일본에서 활동하는 피아니스트의 작품은 몇 번 들어본 적 있었다. 클래식에 대한 자부심 때문만은 아니었다. 조국과 혁명을 찬양하려는 목적도 없이, 음악을 낭비하는 그들을 나는 이해할 수 없었다. 왜 음악으로 사람의 마음을 나약하게 하는지 납득할 수 없었다. 팝이나 록, 재즈도 마찬가지였다. 내가 음악을 하는 이유는 오직, 조국과 인민을 위한 것이었다. 하루도 빠지지 않고 매일 열 시간씩 이어지던 강훈련, 악보를 보지 않고 칠 수 있는 수백 개의 작품들, 그 모두가 머잖아 내가 서게 될 무대, 오직 당과 지도자를 위한 영광된 자리를 위해서였다.


하지만 그날, 카페에서 우연히 듣게 된 연주곡은 날카로운 단도처럼, 내 심장을 찔렀다. 음악이 나를 아프게 했다. 아득히 먼 곳, 손에 닿지 않는 것이 나를 고통스럽게 했다. 그런데 그 절망 같기도 하고 슬픔 같기도 한 무언가가 나를 쓰다듬었다. 내 안에 존재하는지도 몰랐던, 기도보다 간절한 비애가 나를 위로했다.


'음악은 너를 위한 거다.'


아주 오래전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렸다.


'네 음악은 어디 있는가.'


다시 베레조프스키의 목소리가 들렸다.


제목이 뭡니까, 내가 바 건너편에 있던 주인에게 물었다. 남자가 힐끗 보았다. 코리안? 그가 물었다. 나는 북쪽,이라고 말했다. 주인은 어깨를 슬쩍 올렸다 내리고는 사정을 잘 안다는 듯, 주위를 둘러보았다. 시디를 찾아 내 앞에 밀고는 손가락으로 트랙의 번호를 짚어주었다. 낯선 이름이었다. '우리, 지금은 멀리 있어도', 나는 작곡가와 작품 제목을 읽었다. 주인에게 몇 번이나 연주곡을 다시 들려달라고 부탁했다.


가슴이 옥죄어 오는 것 같았다. 나도 모르게 가슴에 손을 얹었다. 단순히 메트로놈처럼 템포를 세는 대신, 나는 마침내 가슴으로 음악을 느끼고 있었다. 그 순간, 조국에 대한 충성심도, 혁명에 대한 열정도 아닌, 그리운 얼굴 하나가 투명하게 떠올랐다. 나는 눈을 감았다. 외로웠다. 나는 음악 속에서 울고 싶었다. 참을 수 없이 미송, 그녀가 보고 싶었다.


"남쪽 음악을 연주하면 반역행위라는 걸 몰랐나?"


테이블 맞은편에 앉은 보위부장이 내게 물었다. 국립 교향악단 수석 피아니스트로 발령받은 지 일주일쯤 뒤였다. 미송에게 프러포즈 하려고 연습하던 곡이 문제였다. 내가 모스크바에서 유학을 마치고 돌아왔을 때, 무용을 전공하던 미송 역시 프랑스에서 돌아와 있었다. 만나지 못한 몇 년 사이 한결 세련되고 아름다워 보였다. 네가 나의 음악이라고, 모스크바 카페의 경험을 이야기한 뒤, '우리, 지금은 멀리 있어도'를 들려주며 고백할 작정이었다.


언제부턴가 많은 사람들이 남쪽의 드라마나 영화, 음악이 담긴 비디오테이프를 돌려보았다. 들키지만 말라는 식이었다. 누구나 알지만 소리 내어 말하지는 않는 비밀이었다. 남한 작곡가의 곡이었지만 연습실에서 미송에게만 들려줄 작정이었고 설사 누가 듣더라도 신고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런데 연습실로 보위부가 들이닥쳤다. 무작정 차에 태워 알지 못할 곳으로 끌고 갔다.


왜 남한의 음악을 연주했는가, 어디서 그 음악을 들었는가, 곡을 연주할 때 어떤 느낌인가, 사흘 밤낮을 꼬박 재우지도 않고 집요하게 캐물었다. 하지만 그들은 내게 손대지 않았다. 모욕적으로 느껴졌지만, 자기비판서 열 장을 쓰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아버지가 가진 권력 덕분이었을 것이다.


"내가 너에게 잘못한 게 뭐야?"


나는 두식을 찾아가 그의 멱살을 잡았다. 내가 살고 있는 세상이 얼마나 광포한지 그때까지도 깨닫지 못했던 나는 두려움보다는 분노를 느끼고 있었다. 분풀이할 대상은 명확했다. 보위부에서는 내가 유학 시절 대사관에 들어가야 할 시간을 몇 차례나 어겼는지, 몇 번이나 술을 마셨는지, 아주 사소하고 일상적인 실수까지도 모두 알고 있었다. 대사관 직원이 보고서를 올렸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생활총화 같은 거 없었으면 좋겠다고, 어렸을 때 농담처럼 한 말까지 진의를 추궁 당했을 때, 가장 친하다고 믿었던 친구, 두식이 밀고자라는 사실을 알았다.


"내가 너와 다른 건 뭔데?"


두식이 비명처럼 소리쳤다.


"왜 너만 모든 걸 가져야 하는데?"


두식의 눈이 시기와 열등감이 뒤섞인 채 장작불처럼 불타오르고 있었다. 두식을 친구라고 생각한 건 내 오만이었을지도 몰랐다. 두식은 아버지의 벤츠를 운전하던 기사의 아들이었다. 아버지의 후원과 뛰어난 재능으로 나와 함께 유학까지 다녀올 수 있었지만 국립 악단까지 허락되지는 않았다. 오디션을 볼 기회도 없이 예술단에 배정받은 두식의 절망을 나는 상상해 본 적 없었다. 하지만 벽에 갇힌 듯 원망과 체념이 혼재된 두식의 눈빛을 보며 나는 비로소 두려움을 느꼈다. 두식과 나의 분노는 맞닿아 있었다. 두식은 자신이 서고 싶은 무대를 선택할 수 없었고, 나는 단 한 번, 사랑하는 여자를 위해 연주하고 싶었을 뿐이었다.


보위부에서 풀려난 뒤, 미송이 나를 찾아왔다. 골목 저 끝에서부터 달려와 나를 힘껏 끌어안았다.


"넌, 자유가 뭐라고 생각해?"


미송이 내 귀에 속삭이며 물었다. 자유? 나는 놀란 눈으로 미송을 쳐다보았다. 나는 자유라는 그 낯설고 그리운 단어를 발설하는 대신, 어금니 사이에 넣고 힘주어 깨물었다. 피아니스트가 피아노를 치는 것이 죄가 된다면, 앞으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비로소 모든 게 분명해지는 것 같았다. 자유는, 내가 가지지 못한 단 한 가지였다.


"마음대로 연주하고 마음껏 사랑하는 것."


내가 답했다. 그녀가 나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자유는, 원망하지 않는 거야. 스스로 선택하고 절대 후회하지 않는 거야."


그녀가 발뒤꿈치를 들고 살짝 입을 맞추었다.


"난, 널 선택했어."


미송이 반짝이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내 두 뺨을 감싸고 다시 부드럽게 입을 맞추었다. 내가 그녀의 허리를 안았다. 별도 달도 없는 밤이었다. 그러나 깊고 따듯한, 우리의 첫 키스였다.


미송은 다시 프랑스로 떠났다. 권력과 멀리 있는 나를 사윗감으로 탐탁지 않게 생각했던 그녀의 아버지는 내가 보위부에서 조사를 받았다는 사실을 용서하지 않았다. 가지 않겠다는 미송의 의견은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다시 돌아오겠다는 약속도 지켜지지 못했다. 떠난 지 6개월 후, 그녀의 아버지가 무대 뒤 연습실로 나를 찾아왔다. 아무 말 없이 문 앞에 침통한 얼굴로 한참을 서 있었다.


불길한 예감이었다. 파리의 아파트에서 자살했다고, 그녀의 아버지가 말했다. 그 아이가 이걸 남겼네. 내게 편지를 건넸다. 그녀가 남긴 단 한 줄의 유서였다.


"견아. 내 자유를 다해서, 널 사랑해."


나는 무너지듯 의자에 주저앉았다.


4.

하혈은 멈추지 않는다. 당장 제왕절개를 해야 산모와 아이를 살릴 수 있을 거라고 말만 할 뿐, 의무병은 무엇을 어찌해야 하는지 모른다. 의술이 있다고 해도, 붕대와 진통제 말고는 아무런 의료시설이 없는 기차 안에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의무병이 해줄 수 있는 일이라고는 두루마리 휴지를 둘둘 말아 여자의 엉덩이 밑에 깔아주는 것뿐이다. 인간이 이렇게 비참해도 되는 것인가, 분노가 치밀지만,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차마 여자를 마주 볼 수 없어서 돌아선다. 차가운 간이침대에 버려진 듯 누워있던 여자의 가느다란 손이 내 팔을 잡는다.


"오빠.."


여자가 꺼져가는 눈빛으로 들릴 듯 말 듯 소리를 낸다.


"오빠, 가지 말라..."


국경을 넘을 때 가족이 다 몰살당하고 혼자 살아남았다던 열다섯 살 꽃제비도 나를 오빠,라고 불렀다. 오빠, 꽃 가질래요? 저녁 어스름이 내리자 숨어 있던 움막에서, 소녀가 말했다. 두만강을 건너 국경 지방에서 한동안 몸을 숨기고 있을 때였다. 공안에게 쫓기던 소녀를 우연히 만나 함께 도망친 다음이었다. 처음엔 소녀의 말이 무슨 뜻인지 몰라 대답하지 못했다. 소녀는 거절인 줄 알고, 무안한 듯 고개를 숙였다.


"내가 좀, 더럽지?"


소녀가 말하며 옷이라고 할 것도 없이 구멍 나고 찢어진 바지 앞쪽을 손 다림질하듯 만지작거렸다.


"내가 좋아서 그러는 거니, 고마워서 그러는 거니?"


내가 물었다. 소녀는 말없이 고개를 더 깊이 숙였다.


"조국 밖으로 나오면 우린 형제다. 넌 동생이고 난 오빠란 말이다. 그러니 너와 내가 그러는 건 근친상간이다. 다시는 그러지 말라."


내가 말했다. 소녀의 바지춤으로 굵은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깨진 유리창으로 바람이 매섭게 몰아치는 밤이었다. 벽 모서리에 웅크리고 앉아 무릎에 얼굴을 묻고 잠이 들었다. 다음날 아침, 눈을 떠보니 소녀는 떠나고 없었다.


강제송환 기차에서 처음 만난 낯선 내 손을 붙잡고, 여자는 눈을 감는다.


"아기는요?"


나는 목소리를 따라 고개를 돌린다. 그제야 도망치다 붙잡혀온 두 명의 탈북자들이 의무실 구석에 묶여 있는 걸 본다. 살아 있는 사람들처럼 보이지 않는다. 그래도 숨을 쉬고 말을 하고 죽은 여자의 태 안에 있는 아기의 생사가 궁금한가 보다.


"곧 죽겠지."


붉은 피가 흥건한 휴지뭉치들을 쓰레기통에 쓸어 담으며, 의무병이 아무렇지 않게 말한다.


말없이 상황을 지켜보던 공안이 화물칸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다그친다. 죽은 여자를 보는 그의 눈빛에 연민인지 동정인지 모를 그림자가 잠깐 스친다. 어쩌면 착각일지도 모른다. 그는 내 두 손에 다시 수갑을 채우고 모질게 나를 앞세운다. 일반객차 다섯 칸을 지나 다시 수화물 칸으로 돌아오는 길, 자꾸 눈물이 흐른다. 맨발은 더 이상 감각이 없고 온몸의 고통 또한 느껴지지 않는다.


"화장실 좀 쓰면 안 되겠습니까?"


내가 묻는다. 눈물과 콧물이 흐르는 더러운 얼굴, 손에도 옷에도 피투성이인 내 몰골을, 공안은 물끄러미 본다.


"문 잠그지 말라."


그가 말한다.


거울 속 내 모습을 보는 게 얼마 만인지 기억나지 않는다. 거울 저편의 남자는 내가 알던 내 모습이 아니다. 세면대의 수도꼭지를 튼다. 물은 아주 조금, 가늘게 흐른다. 나는 수갑을 찬 채 손을 씻고 세수를 한다. 물은 면도 칼로 베인 것처럼 시리다.


처음 두만강을 건널 때도 강물은 발목을 잘라낼 것처럼 시렸다. 미송도, 음악의 자유도 없는 땅에서 나는 숨조차 쉴 수 없었다. 하지만 강의 중간도 채 건너지 못했을 때 경비대에게 발각되었다. 나는 또다시 보위부로 끌려갔다. 이루지 못한 연애, 미송의 죽음과 젊은 혈기가 나를 어떻게 처리하느냐를 결정하기 전 고려 대상이 되었다. 미송의 아버지조차, 힘을 써주었다. 무엇보다, 적발 당시 내가 강을 건너다 말고 돌아오는 중이었다는, 국경경비 대원의 증언이 유효했다. 물론 아버지의 많은 돈이 거짓 증언을 위해 쓰였을 것이다. 어머니의 눈물과 아버지의 당부를 물리치지 못하고, 나는 한순간의 잘못된 실수였다고 스스로 총화 비판했다.


"한 번만 더 가족을 위태롭게 한다면 내 손으로 널 죽여 버릴 테다."


권총을 꺼내 보이며 형이 말했다. 지방의 탄광에서 6개월의 노동을 하며 반성하는 것으로 일단락되었다. 온순히 혁명화 교육을 견뎌낸다면, 그래서 변절의 의심만 거둘 수 있다면 당의 용서를 받고 지방의 작은 악단에 설 수 있을지도 몰랐다.


인가받지 않은 책을 읽었고, 사랑하지 않아야 할 사람을 만났고, 부르지 말아야 할 노래를 불렀기 때문에 끌려온 사람들은 매일 밤 한 장소에 모여 자신의 과오를 반성하고 서로를 향해 손가락질했다. 배급은 허기를 겨우 가릴 정도였고 노동은 가혹했다.


'나는 무엇을 잘못한 것일까?'


눈앞의 부당함과 내가 겪어내야 하는 모욕은 정당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그동안 내가 누린 풍요가 수많은 인민들의 노동과 죽음을 담보로 했다는 것 또한 알 것 같았다. 누구도 신뢰할 수 없는 감시와 고발, 매일 반복되는 자기비판과 서로에 대한 비방을 끝내고 나오면 나는 마지못해 목구멍에 욱여넣었던 저녁밥을 모두 토했다. 반역과 배반을 저지른 건 내가 아니었다. 지상 최고의 낙원을 건설하고 있다고 믿었던 당은 인민 모두를 기만했고 이제는 나를 길들이려 하고 있었다. 그들에게 나는 피아노 치는 꼭두각시였을 뿐이었다. 다시는 그들을 위해 연주하지 않으리라, 나는 이를 악물었다.


나는 경계가 허술한 틈을 타서 다시 도주했다. 닷새 동안 기차를 타고 두만강에 도착했다. 손들어, 총 장전하는 소리가 들렸다. 여기, 돈 있어요, 내가 손을 들어 보였다. 가거라. 세상에 나가 네 인생을 살아. 피아니스트로 살아. 갱부가 되어 비쩍 마르고 새까매진 내 손에 어머니가 몰래 쥐여주었던 이천 달러를 건넸다. 경비병은 총을 거두고 내가 건넨 돈을 세었다.


나는 바짓단에 물 한 방울 묻히지 않고 강을 건넜다. 세상을 다 얻은 것 같았다. 어디에 가도 피아노를 치면 먹고살 수는 있으리라 쉽게 생각했다. 그러나 국경 근처 조선족 마을 사람들은 피아노가 어떻게 생긴 물건인지도 알지 못했다. 돈 한 푼 없었고 도움을 청할 사람도 없었다. 공안의 감시를 피해 산속으로 들어가 9개월간 벌목장에서 일했다. 내 손은 얼어서 터지고 갈라지고 찢어졌다. 바람조차 피할 수 없는 움막에 웅크리고 누워 잠들었지만 그래도 나는 매일 밤 피아노 치는 꿈을 꾸었다.


피아노가 있는 교회를 찾아낸 건 탈북 후 1년이 거의 다 되어서였다. 한국 선교사들이 몽골을 통해 국경을 넘는 길을 주선해 주었다. 열세 시간 버스를 타고 고비사막을 향해 달렸다. 국경도시 얼롄하오터의 출입국사무소 심사를 통과할 수만 있다면, 그래서 몽골로 넘어갈 수만 있다면 러시아든 한국이든 갈 수 있었다. 줄을 서서 기다렸다. 몽골 보따리 상인들과 관광객들에겐 아무것도 묻지 않고, 아무런 제재도 없이 출국 도장을 찍어주었다. 그들은 건물을 나가 차량 출국심사를 마친 버스에 다시 올라탔다. 버스만 타면 5분도 채 걸리지 않아 몽골이었다. 내 차례가 되었을 때, 공안이 출국 카드와 나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등줄기에 땀이 흘렀다.


국경을 넘을 수 있게 도와주고 돈을 받는 브로커들은 북조선 탈주민에게 누가 중국어로 물으면 무조건 '하오'라고만 말하라고 가르친다고 한다. 예스, 그렇다는 뜻이다. 하지만 중국 공안들은 눈치가 이상하면, 너 북한에서 왔지? 하고 묻는다. 탈주민은 하오,라고 말한다. 옆에서 뻔히 그 사태를 지켜보면서도 무슨 일이 벌어진 줄 모른다. 설사 안다고 해도 다른 방법이 없다. 너도 북한에서 도망쳤지? 공안이 또 묻는다. 탈주민은 겁먹은 그러나 순진한 얼굴로, 하오, 하고 대답한다. 나도 그들의 경우와 다르지 않았다. 출입국 관리 공안이 내게 중국 말로, 물었다. 나는 중국어를 몰랐고, 중국어를 모르는 조선족은 없었다.


투먼의 변방구류심사소에 끌려가 죽지 않을 만큼 구타를 당한 뒤 함경북도 국경 보위부에 넘겨졌다. 이렇게 죽는구나, 나는 자살을 결심했다. 자네, 최견 아닌가? 그런데 보위부 관리가 새벽에 은밀히 나를 사무실로 불렀다. 몇 번 집에도 찾아온 적 있는 아버지의 고향 후배였다. 토대가 좋지 않은데도 입당할 수 있게 도와준 분이라며 아버지를 은인으로 여기는 사람이었다. 혹시라도 네가 들어오면 잘 부탁한다고, 찾아오셨었네, 그가 말했다.


내가 도망친 게 알려진 후 아버지는 평양에서 쫓겨나 지방 한직으로 밀려났고 나를 부탁하러 이곳에 다녀간 지 얼마 되지 않아 심장마비로 돌아가셨다고 했다. 혼자 남은 어머니는 전기도 들어오지 않는 오지에 계시고 형 또한 국경 험한 곳으로 좌천되었다고, 그가 전했다. 피가 거꾸로 도는 것 같았다. 나 때문에,라는 죄책감을 평생 지고 살아갈 수 있을지 자신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가 만들어준 가짜 신분증과 여권을 받아 다시 국경을 넘었다. 만약 또 잡혀온다면, 나도 방법이 없네, 그가 말했다. 그땐 나뿐 아니라 일벌백계의 본보기로 어머니와 형 모두 공개처형될 거라는 말을 그가 목구멍 안으로 삼켰다는걸, 나는 잘 알고 있었다.


기차는 달린다. 곧 도착하게 될 중국과 북조선의 국경을 향해 기차는 쉬지 않고 달린다. 이 세상 누군가에게는 숨 쉬는 것처럼 당연한 자유가 왜 나에겐 목숨을 걸어도 얻어낼 수 없는 것인가. 나는 눈가를 훔치고 고개를 든다. 찬바람이 몰아친다. 창문이, 열려 있다. 눈송이들이 자유롭게 날아든다. 함박눈이다. 언제부터 내렸는지 밤인데도 세상이 온통 하얗다. 순간, 나는 못된 짓을 하다 걸린 아이처럼, 주위를 두리번거린다. 안에서 문을 잠그지 못하도록 공안이 문틈 사이에 끼워놓은 곤봉이 보인다. 나는 창밖으로 머리를 내밀어본다. 기차는 터널을 향해 달린다. 속도가 줄어든다. 작은 창을 빠져나갈 만큼 충분히, 내 몸은 앙상하다.

묶여 있는 두 손을 내려다본다. 창틀을 붙잡고 매달려 있다가 적당한 때 뛰어내리려면 거꾸로 나가야 한다. 나는 세면대를 양손으로 잡고, 물구나무 서듯 벽을 더듬어 다리를 들어 올린다. 창밖으로, 두 다리를 먼저 내보낸다. 세면대를 붙잡고 체중을 견디는 두 팔이 파르르 떨린다. 밖으로 빠져나간 맨발이 느끼는 기차의 속도는 너무 빠르다. 나는 온 힘을 다해 엉덩이를 창밖으로 밀어낸다. 그러나 허리가 창턱을 넘으려는 순간, 문이 열린다. 공안과 눈이 마주친다. 심장이 먼저 기차 밖으로 뚝, 굴러떨어지는 것 같다.


공안의 눈빛이 흔들린다. 인상을 쓰는 이마에 굵은 주름이 깊이 팬다. 그가 세면대에 가까스로 닿아 있는 내 손을 꽉 붙잡는다. 나는 그에게 붙잡혀 끌려들어 오지 않기 위해, 필사적으로 버둥거린다.


"기차 바퀴에 깔리고 싶지 않으면 기다려라."


공안이 낮게, 그러나 단호하게 말한다. 밖을 살피고는 다급히 화장실 문을 안에서 잠근다. 주머니를 뒤진다. 열쇠를 꺼내 수갑을 풀어준다.


"대체 왜?"


내가 눈으로 묻는다.


"내 이름은 권이다."


그가 말한다.


"나는 너를 살려줄 힘이 없다. 그러나 네가 할 수 있다면, 살아라."


권이 말한다.


그는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는 듯, 내가 빠져나갈 때까지, 등을 돌리고 서 있다.


폭설이 쏟아지는 11월의 밤. 대지는 평화롭게 잠들어 있다. 추수가 끝난 들판에는 파랗게 보리가 패고, 누군가의 정원에는 노란 국화가 아직 지지 않았을지 모른다. 연인들은 다정한 입맞춤을 하며 침대에 들겠지만 누군가는 머뭇거리지도 않고, 배낭 하나 메고 집을 떠나리라. 무엇을 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어디로든 갈 수 있는 자유. 별은 안개 속에서든, 폭풍우 속에서든, 기어이 길을 밝혀 나그네를 응원할 것이다. 다음 날 아침이면 새로운 빛을 보겠지. 어쩌면 나도, 그런 자유를 가질 수 있을지 모른다. 피아노 건반처럼 하얗게 눈 덮인 오솔길에 발자국을 남기며 세상 끝까지 걸어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 칼날 같은 바람이 뺨을 때린다. 기차는 검은 터널 속으로 들어간다. 나는 매달려 있던 기차의 손잡이를 놓는다. 마치 날개가 있는 것처럼 나는, 높이 뛰어내린다. // 


김규나 단편소설 '우리, 지금은 멀리 있어도'

옮기실 때는 출처( https://www.facebook.com/Qzac1127 )와 저자를 밝혀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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